Alfons Mucha, Winter Night



프라하에서 무하 박물관에 갔을 때 저 그림이 한쪽 벽을 다 차지하면서 크게 걸려있는 걸 봤다. 무하의 평소 그림체에 익숙했던 나는 그림의 크기와 단순함과 색감에 압도되었다. 짙푸른 청색의 어둠 속에 앉아있는 여인의 실루엣. 하얀 눈밭. 저 여인은 무엇 때문에 저러고 있는 것일까. 많은 상상력과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그림이라고 생각했다.


바흐도, 헨델도, 비발디도, 모짜르트도, 브람스도, 슈베르트도, 슈만도, 멘델스존도, 프랑스 낭만곡도, 쇼팽도, 리게티도, 야나첵도, 바르토크도, 퍼셀도, 브리튼도, 엘가도, 쉬츠도, 르네상스 시절의 이름모를 이들의 폴리포니도, 중세음악도 다 필요 없는 때가 있다. 이럴 때는 오로지 베토벤 밖에 없다. 바닥을 치고 올라오는 데는 베토벤밖에 없다. 정말로. 위에 언급한 모든 이들의 음악을 다 사랑하지만, 그리고 사랑할 수 있지만, 인간의 내면 깊숙하게 침잠해들어갈 수 있는 건 정말 베토벤밖에 없다. 그 자신이 그렇게 바닥을 치고 올라온 사람이었기에.


내가 피아노를 잘 치지 못해서 이 곡들을 칠 수 없는 건 피아노에게는 다행이다. 칠 수 있었다면, 피아노줄 몇 개는 끊어먹었을지도 모른다. 1시간 반 동안 씩씩대며 지치도록 걸어대도 풀리지 않는 건 어쩌면 피아노 줄이 끊어져도 풀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지만.

   


Beethoven Piano Sonata 

No.23 Op.57 in F minor

"Appassionata"

3. Allegro ma non troppo

Wilhelm Backhaus, piano

1969년 4월 제네바 실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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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ethoven Piano Sonata 

No.14 Op.27 No.2 in C Sharp minor

"Moonlight"

3. Presto agitato

Wilhelm Backhaus, piano

1958년 10월 빈 실황

Posted by 리히테르


4. Rondo, Allegro ma non troppo
David Oistrakh, violin
Lev Oborin, piano



오이스트라흐의 사진은 늘 "호빵맨"이 생각나게 합니다. 참으로 인심 좋고 넉넉해 보이는 웃음, 그리고 바지 사이즈가 궁금해지는 저 뱃살, 그리고 그 덩치와 표정에 참으로 어울리지 않게 왜소해보이는 바이올린. 대부분의 연주자들이 어느 정도는 그런 면모가 있긴 하겠지만, 특히 바이올린 연주자는 은근히 까다롭고 예민한 분들이 많습니다. 악기가 작아서 연주자 입장에선 표현력이 용이하기도 하고 피아노나 첼로에 비해 기동성이 꽤 훌륭한 악기임에도 불구하고, 음역 때문인지 음정을 정확히 짚어야 하는 현악기의 특성 때문인지, 혹은 제 편견 때문인지 은근히 의외로 까다롭고 예민한 분들이 많더군요. 그래서인지 오랜 세월동안 바이올린을 한 분들은 외모에서 이런 약간의 까칠함과 예민함이 풍겨나오게 마련인데 오이스트라흐의 사진에서는 그런 게 한결 누그러져 보인다고나 할까요. 그의 바이올린 소리는 뱃살에서 나온다고 스스로 언급했던 게 생각이 나, 웃음이 나옵니다.

날씨가 따뜻한 3월의 첫날에 어울리는 곡입니다. 오는 6월에 이자벨 파우스트의 실연으로 듣게 될 곡이기도 하죠. 만세. ㅋㅋㅋ 명연으로 알려진 연주를 다시 올려봅니다. 이번엔 눈부시게 발랄한 4악장. 저번 포스팅[링크]에선 유투브 동영상으로 1악장과 2악장을 올렸었군요. 예전에 전악장을 연습했었어요. 이 곡, 정.말. 어렵더군요. 테크닉이 아니라, 음악이- 언제나, 베토벤이든 모짜르트든, 제가 칠 수 있겠구나 생각했던 건, 늘 음악이 문제였어요. 베토벤이 구현하고자 했던 그 느낌. 그 느낌을 제대로 표현하려면, 얼마나 탄탄한 테크닉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지, 배우기 전에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실을 깨달았을 때 굉장히 놀라우면서도 한편 좌절감이 심하게 들었던 게 사실이지요. 그 때부터 조금씩 조금씩 그렇게 포기했던 것 같습니다. 어차피 내가 직업으로 음악을 연주하는 게 아니라면, 즐겁게 하자고. 그게 아마추어니까. 조금은 괴롭고 힘들더라도, 내 인생 즐겁자고 하는 거, 재미지게 하자고. 남들이야 뭐라건... 어쩌겠나요. 결국은 그 프로와 아마추어 간의 괴리를 어떻게 해도 메꿀 순 없는 것을. 하지만 그런 것도 다 옛날 이야기. 이젠 집에서 썩어가다시피 하고 있는 바이올린을 한 번 꺼내주어야 하거늘, 이런 저런 핑계와 게으름으로 계속 못하고 있으니, 큰일입니다.

어쨌든. 봄이 왔으니 부제가 봄인 곡도 들어주고, 눈호강 좀 해봅시다. 조만간에 피어날 봄꽃들을 소개합니다. 제 기억으로는 21세기 초반에 디카 장만하고 얼마 안 되서 (저 쿨픽스 번호를 좀 보라죠 -_-a) 찍어댔던 것입니다. 그 주 무대가 관악캠퍼스였다는 게 어렷품하게 기억납니다. 지금도 그곳엔 여전히 예쁜 꽃들이 많이 피어있나요.

 

Posted by 리히테르

냉정과

열정 사이


요즘 이래 저래 시끄럽다.
내 선택에 후회하지 않을 거라 믿었는데, 지독한 회의감을 느끼는 상황들이 연속으로 터지고 있고
런던 동서남북을 달달 외워가며 6개월 넘게 벽돌을 쌓듯 차곡 차곡하니 준비했던
휴가마저 위협받고 있는 상황. 일은 정신없이 몰아치고, 마음의 평화는 간곳이 없다.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그냥 떠나버리고 싶은 기분이 하루에 열두번도 더 솟구치는 요즘,
그나마의 업무에 집중하기 위한 최소한의 평정심를 유지해야 하는데, 쉽지 않다.
내가 잃을 게 뭐가 그렇게 많기에,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학문에 대한 미련도, 이제 거의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아마도 일 때문인가 보다. 이 일을 사랑하는가보다. 하지만, 하지만 이건 아니야.
어느 정도는 나를 비롯한 주변사람들의 무책임과 무관심함에 기인한 상황이기에
폭발하기 일보직전의 감정상태는, 일정 부분 이상 내 자신을 향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지간하게 겪을만한 건 겪어봤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젊은가보다.
이런 상황은, 낯설고, 짜증나고, 화나고,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어쨌든 감정적인 upset을 어찌하지 못해 여기 저기 발산하지 않고서는,
정말로 돌아버릴 것 같은 압박감.

"주여, 어디계시나이까.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나이다."
십자가에서 부르짖던 예수의 절규를 그대로 내뱉고 싶은 기분이라니.
종교란, 뜻밖의 상황에서 뜻밖의 위로를 건내준다는 데 그 위력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독한 냉담자이자, 거의 무신론자에 가까운 내가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상황의 심각성에 대한 반증이다.

분당에서 듣고 새로이 발견했던 평화로운 음악을 올려본다. 아마도 비슷한 시기에 작곡되었던
유명한 "봄" 소나타의 분위기와 몹시 비슷한 탓이겠지.
구하기 힘들어서 어렵게 어렵게 구했던 셰링과 헤블러의 연주.
라이센스로 간신히 구했지, 아마...
소중한 만큼 아름답고, 정돈되고, 평화로우며, 단아한 연주이다.



Violin Sonata No.6 in A, op30-1
2. Adagio
Henryk Szeryng, violin
Ingrid Haebler, piano
Posted by 리히테르

베토벤만 연속으로 두 개 포스팅하는 건 이번주 내내 아이폰에다가 베토벤 음반만 6장을 꾸겨넣어서 무한반복으로 돌려듣기를 해서 그런 게 아닙니다... ㅠ_ㅠ ㅎ 요즘 이런 걸 포스팅해야 될 것 같았어요. 그냥요. 그냥.

친절한 설명 따윈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왠지 그러면 댓글로 욕이 달릴 것만 같은 불안감 (...)에 몇 자 적습니다.
Ich denke dien이라는 민요? 가곡? (둘 중에 뭔지 잘 모르겠네요. 베토벤의 가곡 중에서 이런 제목은 없거든요. 아마도 민요가 아닐까 생가합니다 ^^ 당시의 유행가라든지.) 의 선율을 주제로 한 연탄 변주곡입니다. 연주자는 외르그 데무스입니다. 이 분 이제 꽤 늙었죠. 몇 년 전에 하우스 콘서트를 하러 오셨을 때 실황을 봤었습니다. 백발이 성성한 머리로 어마어마한 타건을 구사하시던 걸 마룻바닥에 앉아 온몸으로 진동을 느끼던 경험이 잊혀지지 않네요. 이 곡은 꽤 간단하고 단순한데, 이걸 치고 싶어서 악보를 구해봤더니 아니나다를까 녹록하지 않더군요. 언젠가 저도 연습하고 해서 저랑 비슷한 실력을 가진 분과 함께 연주해 보는 게 꿈입니다... :) 시대악기 연주도 궁금하긴 한데... 연주가 나온게 없다는 건 낚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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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Variations in D major

on the Lied " Ich denke dien "


Jorg Demus & Norman Shelter, piano


from Deutsche Grammophone

Complete Beethoven Edition Vol.6 Klavierwerke







Posted by 리히테르
WoO는 베토벤의 유작에 붙는 번호입니다. 유작이기 때문에 언제 작곡되었는지도 모르고, 오랫동안 빛을 못 보고 묵혀두었던, 어쩌면 베토벤이 아닌 다른사람이 작곡했을지도 모르는 악보들을 발굴해 낸 거겠죠. 치기 어린 젊은 시절에 작곡되었거나, 습작으로 여겨 내버려두었던 작품들이 많아, 한 편으로는 조금 어설프고, 뭔가 부족한 듯한-특히 그의 대작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느낌을 받을 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참 좋습니다. 어찌보면 그런 결함들이, 더 매력적일수도 있겠네요.

Landler는 시골 농부들이 추는 춤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Gianluca Cascioli, piano

Deutsche Grammophon
Complete Beethoven Edition Vol.6 Klavierwerke.




Posted by 리히테르

Mozart, Clarinet Concerto in A K.622
Jack Brymer, Clarinet
Academy of St.Martin-in-the-fields, Sir Naville Marriner


Le Nozze di Figaro Overture,
Karl Bohm, Deutschen Oper Berlin


Beethoven, Symphony No.7
II. Allegretto
Berliner Philharmoniker
Herbert von Karajan


예전에 포스팅 한 적이 있어서 올리진 않고 링크로 대신
Beethoven, Piano Concerto No.5 in Eb
II. Adagio un poco mosso-attaca: 예전 포스팅 링크




위 네 음악의 공통점은...?






























































정답




Posted by 리히테르
2월 23일 수요일, 저녁 8시 예술의 전당 콘서트 홀.

Beethoven "Last" Piano Sonatas

op. 109, No.30
op. 110, No.31
op. 111, No.32


그 다음날인 24일이 USCAP 관계로 출국임에도 꿋꿋하게 예매했던..., 휴, 출국 일정이 조금만 바뀌었어도 피눈물 흘리는 사태가 발생할 뻔했던, 소중한 공연이었다. 외국 연주자의 공연, 특히 피아노 독주 리사이틀은 무려 2년여 만. 라두 루푸의 내한 공연이 캔슬되는 바람에 그렇게 되어 버렸다. 그래도 학생 때는 돈이 없어서 그렇지 콘서트 고어마냥 이런 연주회 저런 연주회 부지런히 찾아다녔는데, 취향이 굳어지고, 인턴, 레지던트를 거치며 그나마 있던 여유시간도 적어지면서 (그래도 임상의사들 보다는 여유있지만) 콘서트를 접하는 일 자체를 거의 포기하기도 했고, 있어도 평일 공연은 가운뎃손가락을 쿨하게 날려주는 -_-a 강심장을 가지게 된 탓이다. 이번 공연은 그런 면에서 더 특별했다. 2월 스케줄을 확인하고 고심 끝에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슈만과 클라라 동호회 단체 예매를 통해 거금을 들여 R석을 예매했던 공연이었다. 공연 당일날까지도 갈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 확신은 없었지만, 어쨋든, 별러온 공연이기도 하고, 레파토리 때문에라도 목숨걸고 보러가겠다는 생각은 했었기에, 꿋꿋하게 마지막까지 취소하지 못했었다. 원래 22일 화요일이었던 비(非) 서지컬 페어웰이 교수님의 사정 때문에 이날로 옮겨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밥과 술을 얻어먹는 회식 따위는 이 공연이 내게 주는 의미에 비하면 그야말로 콧방귀 핑 뀌어줄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지나고 난 다음의 일이니 조금 더 과장을 덧붙여 이야기 해 보자면, 미국행을 포기해도 공연은 포기할 수 없었달까. 시프라는 연주자를 딱히 좋아라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인턴 때 샀던 그의 베토벤 후기 소나타 3개만 녹음한 ECM 음반을 퍽 좋게 들었었다. (트랙백 참조) 정신없는 보라매 외과 말턴 인턴에게는 정말 환한 빛이 되던 베토벤의 후기 소나타 연주였었다. 저녁 6시 15분, 마지막 증례의 헤딩이 끝나자마자 번개같이 옷을 챙겨입고 쏜살같이 병원을 튀어나와 지하철에 올랐다. 지하철에서 음악반에서 호른하셨던 영상의학과 선생님을 우연히 만났다. 마침 같은 공연을 보러 가는 길! 고클래식(링크)에 올라온 Guardian 지와 BBC가 합동으로 제작한 시프의 lecture 동영상 (링크) 에 대해서 도란 도란 이야기하다보니 어느덧 도착. 생각보다 일찍 도착해서, 여유있게 표 찾고 화장실 다녀와서 좌석 안착. :)

좌석은 B블럭 9열 1번좌석 그러니까 무대를 보고 섰을 때 왼쪽 앞쪽에 해당하는 자리였다. 자리가 좋았던 탓에 감동이 배가 된 것도 분명히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정말 이 자리 만족한다. 건반이 보이면서도 음향이 잘리지 않아서 참 좋았던 것 같다. 무서울 정도. 시프의 음색은, amazing, gorgeous, awesome, great, nice, beautiful... 또 없나. 영어로? ㅋㅋㅋ 후... 마침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연극 프랑켄슈타인 (대니 보일 : 우리가 아는 그 대니 보일 감독) 프리뷰를 우리나라 사람 누가 직접 가서 봤다고 자랑자랑 하는 소식에, 정말 몇시간 사이에 평생 당할 염장 다 당하고 마음 한구석이 백탄 마냥 하얗게 타들어가고 있었는데, 간만에 그런 염장 따위 꿋꿋하게 이겨낼 수 있는 공연을 보게 되어서 너무 좋았더라는. 음반에서도 투명하고 예쁘고 아름답다고 느꼈는데, 실황으로 보니 들으니 음반을 부수고 싶은 충동마저. ㅠ_ㅠ 여기 저기 이모 저모 감정적으로 쌓인게 좀 있었던 탓도 있겠지만 30번 3악장 변주곡, 31번 1악장과 아리오소, 마지막 32번 아리에타에서 난 그냥 계속 울었던 것 같다... 휴지기마다 코 훌쩍이는 소리, 침 꼴깍 삼키는 소리가 여기 저기서 들렸던 걸 보면, 나만 그런게 아니라 다행이지만... 맙소사. 그래요. 나 이 후기 세 곡 실황 처음이에요. 이 세 곡은 기교도 기교지만, 그걸 뛰어넘는 감수성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면, 그만큼 사람들을 감동시키기 어려운 곡이라는게 내 생각. 후기 현악사중주와 맥을 같이 하는 베토벤의 이 마지막 작품들은, 아직까지도 좋아 죽는다는 사람은 쉽게 만나기 어렵기도 하거니와, 그런 만큼 상대적으로 내가 그 곡들을 무섭게 좋아하는 이유를 잘 설명하기 힘들기도 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정말 난 이 세 곡을 죽자 사자 좋아하는데, 사람들이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중에서 뭘 제일 좋아하냐고 물어보면 망설이지 않고 이 세 곡을 꼽는데, 왜 좋아하냐고 물어보면,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린다. 말로 표현하기 참 힘든 부분이다. 그냥, 베토벤이라는 사람이 자기 인생을 담아낸 이야기 같아서, 내가 이만큼 치열하게 살아왔고, 그렇게 살아왔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곡을 써냈다는게 믿어지지 않게 놀라워서, 그래서 감동적이라고 하면, 좀 오글오글하려나. 어쨌든, 본 공연은 정말 성공적으로 끝났다. 호불호가 갈리는 부분이 많이 있겠지만, 그리고 난 다른 리뷰들을 읽어보지 않아서 이게 객관적으로 어떤 공연이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본공연에 한하여 개인적인 감상평을 끄적여 보면 다음과 같다.
인상적인 부분을 몇 꼽자면, 우선 31번 1악장의 아르페지오. 보통 다른 연주들은 트릴이나 반주의 개념, 즉 화성의 개념으로 정신없이 쳐내려가는 이 아르페지오를 시프는 예외적으로 아주 또박또박 "성실하게" 치는 느낌. 한 음 한 음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그런 연주였다. 그리고 다른 연주에서는 느낄 수 없는 독특한 리듬감과 다이나믹. 순간적으로 어. 이게 그 거? 반응이 나올 정도. 그만큼 속도가 느려졌기 때문에 답답하게 느끼는 사람도 있었을 것 같지만, 그리고 예전의 나라면 역시 싫어했겠지만, 뭔가 차분하고, 정돈된 느낌이어서 색다르게 들렸다.
그리고 30번 3악장 변주곡의 테마. 시프 자신도 이 곡에 대한 애정이 굉장히다고는 들었지만, 직접 보니 정말 대단하긴 대단했다. 이게 이렇게 가슴을 울리는 곡이었나, 싶었다. 난 30번에 대한 애정은 나머지 두 곡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빈약한데, 아... 내가 이걸 몰랐다니. 재발견. 이건 소름이 끼치는 수준이었다. 명불허전, 음악을 들으면서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것도 얼마만인가. 
이 두 가지 말고 나머지는... 정말 딱히 뭐라 할 말이 없다. 전체적으로 다이나믹의 폭도 넓어서 굉장히 풍부하게 들리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너무나도 좋았으니까. 공연이 끝나고 박수를 칠 때, 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도대체 어디에 앉아있는 건지, 여기가 천국인지 지옥인지 눈앞에 보이는 저 무대가 정말 아득하게 느껴질 정도의 아찔함을 경험했다면... 이게 소위 "뽕 맞은" 기분인건가. 그렇다면 왜 마약중독자들이 자꾸 마약하는지 알 것 같다는 정도의 기분이었다면, 대충 전달이 되려나 모르겠다.

이 정도가 본 공연이었다. 대박은 그 다음. 그러니까 앵콜곡. 앵콜곡 정말 다시 생각해도 ㅎㄷㄷ 였다는.

시프의 앵콜곡은
Schubert 의 Impromptu(즉흥곡) D.899의  No.1(C minor)와 No.2 (Eb major), 그리고 Bach의 Well-tempered Clavier, Book 2 (평균율 2권)의 No.1 BWV 870 C major Prelude & Fugue.
헐킈. 첫 앵콜곡이 시작되었을 때, 슈베르트 즉흥곡이라는걸 바로 알아차렸기에, 그 긴 곡을 두 개나 칠 거라는 예상을 전혀 못했었다. 맙소사. 그거 한 곡이 최소한 10분 안팎을 달리는 곡이잖아. 이럴 수가! 관객의 열정적인 박수와 커튼콜이라고는 했지만, 인터미션도 없이 그 대곡을 셋이나 연주해 놓고 또 셋이나. 이건 뭐. 저 레파토리들은 그냥 따로 연주회 차려도 손색이 없는 곡들이잖아요. 응? 이 아저씨가 뭘 먹고 이렇게 기운이 좋은 겁니까. 시프의 음반을 몇 개라도 사 본 이들은 저 레파토리를 보면, 그가 자기가 잘 하는 곡, 자신 있는 곡은 이 연주회에서 아낌없이 풀어놔 주었다는 걸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냥 연주회를 1.5배 해줬다고 보는게 맞을 듯. 표값이 아깝지 않았다. 정말 오래간에 눈이 뿌옇게 되고 코를 훌쩍이며 손이 부셔져라 박수를 치면서, 이 공연 오기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게다가 본 공연에서 아리에타가 끝나고 박수 타이밍이 조금 빨랐다 싶어서 분위기가 살짝 싸했는데, 앵콜곡 박수에서는 정말 관객과 연주자와의 교감이 잘 나타나주어서 더 좋았고.

끝나고 싸인회가 있었다. 줄이 굉장히 길었는데, 한시간 반 여를 기다렸지만 정말 마지막 한 사람 까지 다 싸인해준 시프, 수고 많았어요. 피아노 치느라 팔도 아팠을 건데... 대단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더 많이 늙기 전에, 한 번 더 와서, 당신이 더 잘 하는 레파토리를 들고 와서, 우리 모두가 다시 한 번 뜨거운 가슴으로 진심을 담아 박수를 칠 수 있기 되기를. Viva!



안드라스 시프의 사인회


피아노 공연이 있으면 항상 음반과 악보를 챙겨가는 건 습관이 된 듯. 이번엔 빈 원전판 베토벤 후기 소나타집 악보에 시프의 싸인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하. 칠 줄은 몰라요. 칠 줄 알면, 좋겠지만- 그저 악보를 보고 뚱당거리고 다시 듣고, 그렇게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곡을 외우게 되더군요. 아는 만큼 의식적으로 어디가 틀렸는지 귀를 쫑긋하면서 듣진 않지만, 그래도 아예 모르고 듣는 것 보단 더 재미있게 들을 수 있는 건 사실인 것 같아요. 싸인회가 끝나고 흥분한 마음과 여운을 가라앉히고 가려 오랫동안 서성거렸는데, 덕분에 시프의 긴장 풀린 자연스러운 자세와 표정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다행이에요 :)

그의 ECM음반 녹음을 하나 올려봅니다. 다시 들어봐도 실황 연주와 음반 연주가 상당히 비슷한 스타일이네요!


Beethoven, Piano Sonata, No.31, Op.110
in Ab major
1. Moderato cantabile masto espressivo
Andras Schiff, piano
Posted by 리히테르





Fifteen Variations and Fugue for Piano in E-flat major, op.35
composed in 1802, first published in 1803
dedicated to Count Maurice Lichnowski

played by Sviatoslav Richter, piano  

교향곡 3번 '영웅' 4악장의 주제를 이용한 해맑은 변주곡.
My favorite beethoven variation!

리히테르 연주가 아마 BBC에서 한게 있고, Philips에서 한게 있고, 프라하 실황도 있는데...
어떤 건지는 잘 모르겠다. 어느 연주든, 다들 최소한 30~40년이 넘은 연주들이라...
오래 묵은 포도주와 같이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는 게 단점이다.
그의 타건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곡이기도 하다.

디아벨리가 좀 식상하고 단조로우며 연습곡같은 느낌이 강하고
다른 변주곡들이 딱히 확 와닿는게 없는 반면에
아무래도 친숙한 멜로디를 이용한 이 변주곡은, 마지막 푸가에서 그 화려함의 절정을 이루는
꽤나 기교적인 곡임에도 불구하고, 큰 부담 없이 메인 테마가 요리조리 꼬이는 맛을 보는데는 부족함이 없는 듯 하다.

Corot, Le Jouer de flute du lac dalbano


Posted by 리히테르


3. Allegretto
Sviatoslav Richter, piano
recorded in 1961


더위도 더위지만, 이런 저런 일들로 속에 천불이 쌓여가는 날들이다.
근본적인 돌파구를 찾지 못한 상태에서
조금이라도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고, 악보를 찾게 되는 음악이 있다.

이번엔 베토벤의 템페스트.
그것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열정적인 리히테르의 연주.

예전에 1악장을 엄청 열심히 연습하여 얼추 완성을 보았고, 3악장도 하려고 했는데
화성학적 지식의 부족과 능력 부족이 겹쳐 중도 포기했던 경험이 있다.
3악장은 오히려 1악장에 비해서 기술적으로 어려운 곡이 아니라, 나같은 아마추어도 많이들 시도한다.
조금만 더 연습했으면, 끝을 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늘 아쉬움이 남는다.

집 근처가 학원가인지라, 주말에 다닐 만한 피아노 학원을 알아보려고 했지만
내가 게으른 탓인지, 요새 학원들이 진짜 불경기인 탓인지,  
당최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피아노 학원들은
토요일 오후에 갈 때 마다 문이 닫겨 있더라는.

이것 말고도 다시 쳐 보고 싶고, 다시 배워보고 싶고,
새로 또 배워보고 싶은 곡은 많지만...

언젠가 기회가 된 다면 끝을 보고 싶은 (내가 끝을 보고 싶다 함은,
적어도 남들 앞에서 연주를 내보일 수 있다는 정도를 말한다.) 곡 중의 하나이다.

무한 반복되는 주제 선율은, 다이나믹한 1악장 못지 않게
충분히 이 곡의 표제인 'tempest'에 부합해서 몰아치는 느낌을 준다.

윌리엄 터너의 그림을 USCAP에 갔을 때 워싱턴 내셔널 아트 뮤지움에서 보고
기억에 남아있었다. 그의 그림이 마침 이 곡에 퍽 잘 어울리는 듯 해 몇 장 올려본다.


Posted by 리히테르




냠... 필 받은 김에 끝장 보자.

크리스티앙 짐머만과 번스타인의 연주.

짐머만의 수염 덮인 모습도 참 오랜만에 보는 것 같고...
오메. 번스타인이 저렇게 뚱뚱했던 적도 있었고나.

1악장도 꽤 길어서 동영상이 둘로 나뉘어져 있다.
개인적으로는 황제 1악장보다 이걸 더 좋아한다.
짜임새 면으로 보자면 사실 황제보다 더 고전적이기도 하기 때문에, 굉장히 빈틈없고 탄탄하다.
카덴짜의 트릴 부분은 정말 최고....



Posted by 리히테르